< India Report-I 'the Episode in Veda' 갤러리 아미1999.18-24 June > 소멸에 대결하는 회화 -필립 다쟝(미술평론가)-한세기도 넘게 서양의 화가들은 머나먼 동양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명료함과 생동감을 배워왔다. 그들은 목판이나 서예와 같은 다소 피상적인 장르를 시도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이 분야의 원리와 실제를 잘 모르고 있었던 만큼 이 장르들은 한층 더 피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서예를 속도와 제스처가 결합된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쯤으로 생각했다. 즉 화가의 열정과 행위가 각인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호문자라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경솔하게 서예를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 그리고 서예란 단지 지진계처럼 충동을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보다 훨씬 더 많은 철학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서예를 이해했다. 여기 고영일이란 한국인 화가가 있다. 그는 이 모든 유행 -즉 경솔한 이국적 취향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의 예술은 과시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으며 엄격하고 까다롭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결코 예술가연하지 않는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행적 또한 기이한 면이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인도에서 살며 델리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다.Depuis plus d’un siècle, les peintres occidentaux regardant dans la direction de l’orient lointain, ils lui demandent des leçons de netteté et vigueur, ils se reclament tantôt des estampes tantôt de la calligraphie, références d’ordinaire superficielles, d’autant plus superficielles que la plupart de ces peintures ignorant à peu près tout du sens et de la pratique de cette discipline. Ils ont cru y voit un expressionnisme abstrait où vitesse et danse s’allient -un alphabet de signes vacants où leurs passions et leurs gestes pouvaient s’inscrire ils en ont pris possession, à la légère, au risque de l’altérer et de le travestir, au risque de ne pas s’apercevoir que cette calligraphie n’est pas une sismorgraphie, qu’elle tient bien plus de la philosophie que du dessin. Voici un peintre coréen, Ko. Il est à l’opposé de ces modes, de cet exotisme facile. Son art est sévère, difficile, sans ostentation ni bavardage à l’image de son auteur du reste, qui ne pose pas à l’artiste. Etrange artiste du reste, jusque par sa biographie. Il vit depuis plusieurs années en Inde. Il a son atelier à New-Delhi. 그는 인더스의 높은 계곡으로부터 라자스탄과 데칸고원을 거쳐 인도 남단 페닌슐라에 이르기까지 인도 곳곳을 쏘다닌다. 이러한 유배생활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자기 고향을 떠나 현대미술의 회로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는가? 이상한 것은 그가 한국의 전통서예를 알고 있고, 최근 수십 년간의 미국과 유럽회화의 동향에 대해서도 역시 모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의 회화는 반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아카데미즘의 냄새도 전혀 풍기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다. 그것은 전례(前例)와 식별 가능한 모델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가 보고 느끼고, 그를 흔들고 붙잡는 그 어떤 것을 이해하고 풀어내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한 장소에서 -그것이 인도의 어느 지역이건 상상의 장소이건 간에- 그는 하나의 풍경거리를 끌어내려 하지도 않고 뭔가를 묘사하려 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몇몇 상징적 형태와 암시적 기호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정확한 구상도 완전한 추상도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구분은 분명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된 수많은 분파들의 추상과 구상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 또한 더더구나 무의미한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을 통해 이른바 『리얼리티(réalité)』-달리 대신할 말이 없으므로-를 향한 통로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바로 이러한 추구이며 우리는 그 시도를 분명히 읽을 수 있다.Il voyage de la haute vallée de l’Indus jusqu’au sud de la péninsule, à travers le Rajasthan et le Deccan. Première étrageté que cet exil. Pourquoi avoir quitté son pays natal pour une ville très à l’ecart de tous les circuits de l’art contemporain? Autre singularité : il connaît la calligraphie traditionnelle coréenne et il n’ignore pas non plus la peinture américaine et eurepéenne des dernières décennies. Et cependant son art n’est ni de répétition ni de compromis, il ne relève d’aucun académisme. Il ne ressemble à rien de connu. C’est une tentative libre de précédents et de modèles identifiables. Tentative de quoi ? De compréhension et de déchiffrement de ce qu’il voit, de ce qu’il ressent, de ce qui l’ébranle et le retient.D’un lieu, que ce lieu soit une région de l’Inde ou un pays rêvé, il ne tire pas la matière d’un paysage, ni d’une description, pas plus qu’il ne se satisfait de quelques formes symboliques, de quelques signes allusifs. Il ne se veut en somme ni exactement figuratif, ni définitivement abstrait – et ces catégories non, dans doute, guère d’importance à ses yeux, pas plus que les débats interminables qu’elles ont suscités entre chapelles et partis en Europe et aux Etat-Unis. Il cherche, à sa manière, à son rythme, un passage vers ce qu’il faut appeler, faute d’autre mot, la réalité. Chaque tableau est cette avancée, lisible clairement. 그의 작품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협력한다. 예를 들면 그는 흙이나 인도의상에서 볼 수 있는 몹시도 강렬한 적색, 또는 황색으로 색채를 흥분시키며, 때로는 흰색과 검정색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최근의 작품들을 보면 검정색, 그것도 목탄 같은 질감의 두터운 검정색 덩어리가 화폭 중앙에 빈번히 전개되고 공간을 침범하여 화면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이 더 멀리 갈 수 없게 하고 화면의 깊이감을 가로 막으려, 오히려 빛과 색채가 살아있는 달무리와도 같은 화면 주변으로 시선을 이동하게 한다. 이는 단지 회화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화면을 검게 함으로써 고영일은 지각(知覺)의 불가능성, 맹목성, 밤을 통한 삼라만상의 은닉을 암시한다. 사실 이 문제는, 간접적으로는 회화가 극복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검정색은 분명 강한 부정이며 위협인 것이다. 『가나안 Canaan』 이라는 명제의 연작 대부분이 이러한 위험과 그 전개, 그리고 이 위험에 대해 화가가 취하는 방어자세를 주제로 다룬 듯이 보인다. 화가는 어떻게 해서든지 화폭에 덮쳐오는 검은 그림자로부터 화폭을 지켜야만 한다. 물감의 튀김, 여기저기 보이는 급히 갈긴듯한 문자와 숫자, 희귀한 오브제처럼 보이는 항아리와 술잔, 찻잔들-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이 모든 요소들이 검정색과 대결하고 나선다. 이는 결국 지워짐과 잊혀짐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징적 대비일까? 확실히 그렇다. 그것은 회화 자체의 생존이거나 또는 부정 - 암흑과 같은 모노크롬- 이다. 긴장 감도는 화폭에서는 비장한 분위기가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그림은 너무나도 밝은 흰색의 눈부심과 너무나도 깊은 검정의 심연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미래 사이에 걸쳐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균형 잡혀 있으나 이 균형은 순간적이고 불안정해 보인다. 자칫 어느 한 쪽이 모자라면 다른 한쪽으로 기울 것 같은 그런 균형. 그리하여 동그라미, 또는 돌과 나무들의 희미한 윤곽 -긁은 자국들은 이러한 소멸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Tout y collabore, dans l’oeuvre. Ainsi de la couleur, qu’il exalte quelquefois en rouges et jaunes violement intenses, aussi intenses que les rouges et les jaunes des terres, des poudres et des vêtements indiens. Ainsi plus encore de l’opposition du blanc et du noir. Dans les toiles récentes, il arrive fréquemment que le noir, un noir charbonneux et épais, développe sa masse au centre de l’espace, l’envahisse, l’obscurcisse, empêche l’oeil de regarder plus loin, obstrue la profondeur, repousse sur les côtés ce qui demeure de lumière et de couleur des traces, des halos. Effet seulement pictural ? Sûrement pas. En noircissant la surface, Ko suggère l’impossibilité de la perception, l’aveuglement, la dissimulation nocturne de toute chose, il est alors question, indirectement, de peinture dans la toile, des difficultés qu’elle veut vaincre et doit éviter. Le noir ici est, fortement négation et menace. Dans la série intitulée Canaan, bien des toiles semblent n’avoir d’autre sujet que ce danger, ses progrès, les défenses que le peintre lui oppose. Il lui faut à toute force préserver la toile de l’ombre qui tombe sur elle. Les éclaboussures decouleur, les lettres et les chiffes qui se distinguent par place, tracés dans l’urgence, et jusqu’à de rares objetsvases, copues, tasses, on ne sait au juste, tous ces élèments s’opposent au noir. On croiranit qu’il s’agit de les préserver, de les sauver de l’effacement et de l’oubli.Oppositions symboliques? Assurément. Il en va de la suivre de la peinture elle-même ou de sa négation-le monochrome de ténèbres. Dans les toiles le plus tendues, le sentiment d’une tragédie s’impose peu à peu. La peinture est suspendue entre deux devenirs contradictoires-l’englouissement dans le noir trop profond. Telle qu’elle apparaît, elle se tient en équilibre, équilibre que l’on suppose instable et éphémère. Il s’en faut de peu qu’elle ne glisse d’un côté ou de l’autre, dans un excès ou dans un autre. Chacun d’eux-n’est-ce pas là, la leçon?-serait négation. Les cercles, les fantômes de rochers ou d’arbres, les griffures font obstacle à l’anéantissement. 이 같은 논리를 보다 정당화하기 위한 비교가 필요하다면 고영일과 사이 톰블리(Cy Twombly)를 나란히 놓아볼 수 있겠다. 그들의 작품은 제작과정이나 외양이 크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을 공유하고 있다. 두 사람의 작품들은 모두 공백 위에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하고 얇으며 유동적이라는 느낌은 그들 작품의 공통적인 요소이다. 부서질 위험이 따르지만 그림은 스스로를 여전히 지탱하고 있다. 그들 그림들은 삼켜지고 용해되기를 거부한다. 우리들은 우화의 세계, 책과 시, 수 많은 이름과 작품들, 그리스, 로마신화의 세계가 언젠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미 그들로부터는 부서진 폐허, 희미한 추억, 불확실하고 알쏭달쏭한 비문들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 너무나 빈 흰 종이에, 너무나도 중성적인 회색 모노크롬 위에 톰블리는 핏빛 같은 붉은색을 뿌리고 글씨를 쓰며 불완전한 형상들, 보잘것없는 선들-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근사한-을 긁적거린다. 고영일의 작업도 타인의 작업과 유사성이 없지 않다고 가정해 볼 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예술행위는 혼돈과 교류, 변화와 비행으로 점철된 현대와 거리를 두고 본질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에 근거한다고 답한다. 그는 오늘날의 서두름과 완만함, 소란과 고요, 산만함과 평정을 기꺼이 대비시킨다. 그가 격렬하지 않게 드러내는 이러한 신념은 불교가 발생했고 그것이 변질되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는 요새(要塞)같은 산중사찰이 있는 라닥이나 잔스카 같은 지역에 대해 그가 지니고 있는 애정과도 연결된다. 그는 또한 심각하게 변질되고 망각될 위기에 놓인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그래서 그는 최근 그의 그림에 고대 도기의 형태를 흰 화폭에 아주 희미한 회색조로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뜻밖의 암시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무엇인가가 하나의 추억, 아니 하나의 문명이, 일관적이고 표준화된 국제적 양식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려는 것일까? 부적당한 비교일까? 다소 복잡한 그들의 자전적 요소를 들추어 낸다는 것은. 미국 태생의 톰블리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로마에서 자발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으며, 한국인인 고영일은 델리에서 똑같은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탈과 고립은 그들 두 사람 모두 타협을 거부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이 시대의 불행이 무엇인지 너무나 극명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와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이방인임을 느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너무나도 정확히 총체적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S’il fallait un parallèle pour se justifier, il mettrait en présence Ko et Cy Twombly. Leurs oeuvres, si différentes soient-elles de procédés et d’apparences, ont ceci en commun : elles semblent tracées sur le vide. La fragilité, la minceur, la fluidité sont leurs points communs. La destruction menace – mais l’oeuvre resiste encore. Elle refuse de s’engloutir ou de dissoudre. Dans le cas de Twombly, on sait l’enjeu : un univers de fables, de livres, de poèmes, de noms et d’oeuvres, les mythologies grecques et romaines, pourrait disparaître.Il n‘en reste déjà plus que des vestiges qui s’émiettent, des souvenirs brouillés, des inscriptions incomplètes ou fautives. Contre le blanc d’un papier trop vide, contre le gris d’un monochrome trop neutre, Twombly jette des rouges sanguins, gribouille des noms, esquisse desfigures incomplètes-barrages dérisoires et néanmoins admirables.Il se pourrait – hypothèse – que la démarche de Ko ne soit pas sans analogie. Interrogé sur ce point, l’artiste répond que son entreprise artistique se fonde la volonté décidée de se tenir éloigné du monde contemporain-compris comme chaos de trafics, echanges, passages et survols et de se rapprocher de l’essentiel, il oppose volontiers la précipitation d’aujourd’hui à la lenteur, le brouhaha au silence, la dispersion au recueillement. A cette conviction, qu’il exprime sans violence, s’accorde son goût pour les régions où est né le bouddhisme et où il s’est maintenu intact, dans des monastères qui semblent des forteresses bâties dans les montagnes du Ladakh et du Zanskar. Il se dit encore soucieux de préserver ce qui fut la culture de son pays, menacée de métamorphose fatale et d’oubli. Aussi, sans ses dernières toiles, a-t-il introduit les formes de très anciennes poteries, peintres d’une nuance de gris très pâle sur le blanc de la toile. Pourquoi ces allusions inattendues, si ce n’est pas pour rappeler que quelque chose, une mémoire, s’abolir dans l’uniformité, les standardisations, les modes planétaires, la consommation courante?Comparaison déplacée ? Que l’on prenne en considération cependant de éléments biographiques qui ne sont pas de simples détails. Twombly, américain de naissance, vit depuis des décennies en exil volontaire à Rome et Ko, coréen, vit en exil volontaire à New-Delhi. Ces deaparts, ces mises a l’ecart signifient de la manière la plus évidente que l’un et l’autre se refusent au conformisme, qu’ils se sentent étrangers dans une époque dont ils voient trop nettement les misères pour admetrre d’ être confondus avec elle. Ils voient trop juste, en somme. 고영일의 회화는 이러한 성찰, 즉 먼 포석 -『거리두기』에 기인한 것이다. 관조적이고 명상적이며 사려 깊어 엄격한 그의 회화는 우리를 유혹하지도 놓아주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근사함을 지향하지도, 희한한 솜씨를 보여주려 하지도 않는다. 극도로 절제된 채 적확(適確)한 표현을 구사하는 그의 회화는 시각(視覺)을 통해 사유(思惟)로 향한다. 이러한 영적능력(靈的能力)을 소유한 화가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La peinture de Ko est à la mesure de cette réflextion et de cette mise a distance. Réfléchie, contemplative, meditative, rigoureuse, elle ne veut ni séduire ni distraire. Elle n’aspire ni au spectaculaire ni au tour de force. Econome de ses moyens, mais précise, elle va jusqu’à la pensée par le canal de l’oeil. On ne sait qu’il n’est donné qu’à de très rares peintres d’accèder à cette qualité spirituelle. Peindre contre le néant-Philippe Dagen-